전 흥 남(순천대 강사, 문학평론가)
전 흥 남(순천대 강사, 문학평론가)

하얀 눈 밑에서도 푸른 보리가 자라듯/삶의 온갖 아픔 속에서도/내 마음엔 조금씩/푸른 보리가 자라고 있었구나//꽃을 피우고 싶어/온 몸이 가벼운 매화 가지에도/아침부터 우리 집 뜰 안을 서성이는/까치의 가벼운 발걸음과 긴 꼬리에도/봄이 움직이고 있구나//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내 마음의 바위 틈에/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일어서는 봄과 함께//내가 일어서는 봄 아침/내가 사는 세상과/내가 보는 사람들이/모두 새롭고 소중하여/고마움과 꽃망울이 터지는 봄/봄은 겨울에도 숨어서/나를 키우고 있었구나//(이해인, <봄이 오는 길목에서> 전문)   

이해인 시인의 <봄이 오는 길목에서>의 전문이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고, 또 계절마다 고유의 특성이 있지만 봄을 예찬하는 글들이 유독 많다. 이는 봄이 되면 만물이 소생한다는  생명력과 경사(慶事)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양력으로 2월 4일 입춘에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고 써서 대문이나 기둥에 한 해의 행운 및 건강을 기원하는 글귀를 붙이던 풍습이 있었다. 이 글귀를 우수(2월 19)쯤에 이르면 뗀다. 입춘을 지나 우수,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깬다는 경칩(3월 5일)까지를 ‘봄이 오는 길목’이라고 한다. 지금 이맘때가 봄이 오는 길목인 셈이다. 

필자도 종종 산문을 쓰는 입장에서 글의 장르상 특징이 있고 독자들에게 주는 영향(혹은 효과)이 각기 다르지만, 시가 주는 파급력과 호소력에 매혹될 때가 있다. 인용한 시도 봄의 생명력과 매력을 속 깊은 울림을 통해 발휘하고 있다. 작가들이 봄을 유독 예찬하고 또 독자들도 공감하는 이유를 톺아볼 필요는 느낀다. 

이해인 님의 시를 모두(冒頭)에 소개한 것도 시를 분석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분석하면 시의 맛을 잃어버릴 것 같다. 보통의 감수성을 소유하면 시인의 속 깊은 내면세계와 메시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시어만 일별(一瞥)해 보아도 우리의 정서상 반갑고 소중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푸른 보리’ ‘까치’ ‘물소리’ ‘매화’ ‘꽃망울’ 등등 굳이 분석하지 않아도 혹한의 겨울을 감내하고 새싹을 틔우는 희망과 서기(瑞氣)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얀 눈 밑에서도 푸릇푸릇 싹을 틔우며 돋아나는 보리를 보면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고, 부산하게 움직이는 까치를 보면서 반가운 소식을 전해줄 징조를 기대한다. 겨우내 얼었던 물소리를 들으면 또 얼마나 반가운가. 봄의 전령사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리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3월에 이르러 광양 다압의 매화꽃이 만발해 어우러진 풍경은 생각만 해도  행복의 미소가 입가에 번진다. 아니 남도의 매화는 곳곳에서 상춘객들의 발길을 모은다. 이렇게 신비한 자연의 생명력과 조화에 귀 기울이면서 우리네 삶도 봄이 오는 길목에 오면 왠지 희망을 품고 싶다. 

꽃길만 이어지는 삶도 거의 없듯이 시련과 역경으로만 치닫는 인생도 없다고 본다. 시련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면 꼭 나쁘지만은 않다. 불가(佛家)에서 우리네 삶을 사바세계 혹은 고해(苦海)로 함축하고 있듯이 삶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삶의 이러한 속성을 모르지 않기에 ‘봄이 오는 길목’에 서면 이해인 시인의 말처럼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보는 사람들’ 이 모두 새롭고 소중한 마음으로 더 꽉 찼으면 싶다.

chn007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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