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희 구{시조시인∙문학평론가문학박사∙필명 여명 장강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장 희 구{시조시인∙문학평론가문학박사∙필명 여명 장강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漫題(만제)

                                                        수은 강항

 

        반생의 흙 한 줌인데 십층 금전 웬 말이며

        총알 동나 남의 손에 쥐어지는 그 날 되면

        일본은 나라 뒤집혀져 내닫는 것 문제없지.

        半生經營土一杯    十層金殿謾崔嵬

        반생경영토일배    십층금전만최외

        彈丸亦落他人手    何事靑丘捲土來

        탄환역락타인수    하사청구권토래

일본이 우리를 침범한 횟수만도 헤아릴 수 없다. 인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수많은 목숨이 나라를 위해 바쳐졌다. 어떤 이는 맨손으로 싸우고 어떤 이는 적진에 들어가 나라의 긍지를 심으면서 적정(賊情)을 탐지하여 본국에 알리는 염탐도 마다하지 않았다. 적장이 넘어져서 휘황찬란하게 꾸민 묘역을 보고 조소어린 글을 써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한 편의 시를 만난다. 적국의 나라였으니 필연코 그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 읊었던 시 한 편을 번안해 보았다.

푸른 언덕 뒤엎고 내닫는 것쯤이야 문제이런가(漫題)란 뜻으로 쓰인 칠언절구다. 작가 수은(睡隱) 강항(姜沆:1567∼1618)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반생동안 했던 일이 흙 한 줌과 같은 잔인데 / 십층 금전 울룩불룩 누구를 속이자는 것이던가 // 총알이 떨어져서 남의 손에 쥐어지는 날이 되면 / 푸른 언덕 뒤엎고 내닫는 것쯤이야 무슨 문제이런가]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어설픈 제목]로 번역된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자 일본의 번화가인 북문에 묻었다. 묘의 위에 황금전을 짓고 외승(倭僧) 남화(南化)의 글이 대서특필로 묘 옆에 붙여졌다. [대명 일본에 일세를 떨친 호걸이 태평(太平) 길을 열었으니 바다는 넓고 산은 높다]라는 글씨다. 풍신수질은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장본인이다.

이를 본 시인은 북문 밖을 구경삼아 놀러 갔다가 어이가 없어서 붓으로 쭉쭉 문질러 버리고 그 곁에다 쓴 시문으로 일본과 풍신수길을 폄하하는 글이다. 일본을 다스리는 일을 이루어 내고 조선을 침략한 일을 도모했다고는 하나 묘를 황금전으로 지은 들 과연 이는 누구를 속이자는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보통 사람의 간담으로는 어림도 없는 문구다.

 화자에겐 인생무상임은 어찌 할 수가 없다는 뜻이겠다. 총알이 떨어지고 남의 손에 쥐어지는 날은 일본 패망을 가리킨 내용으로 적진에 들어가 이 글을 썼던 대담성을 엿본다. 총알이 다 떨어진다는 것은 나라의 운세가 다 한다는 뜻이니 비유적인 표현이다. 너희들도 앞으로 모든 것이 동이 나서 망할 날이 머지않았으니 하는 뜻을 담았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반생 일이 흙 한 줌만 십층 금전 누구 속임, 모든 총알 떨어지면 푸른 언덕 뒤덮일 걸’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작가는 수은(睡隱) 강항(姜沆:1567∼1618)으로 조선 중기의 유학자, 1588년(선조 21) 진사가 되고, 159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교서관박사와 전적을 거쳐 1596년 공조, 형조 좌랑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남행 도중에 왜적의 포로가 되었다가 1600년에 풀려났다.

【한자와 어구】

半生: 반생동안. 經營: (반생동안) 했던 일. 土一杯: 한 줌 흘과 같은 잔. 十層: 십층. 金殿: 금붙이는 만든 궁전. 謾崔嵬: 누구를 속이자는 것인가. // 彈丸: 총알이 떨어지다. 亦落: 또한 떨어지다. 他人手: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다. 何事: 무슨 일. 靑丘: 푸른 언덕. 곧 ‘한국’임. 捲土來: 흙을 말아 내달려 가다.

저작권자 © 광양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