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읍 세풍리에서 바라본 무선재의 현 모습(사진 위). 1948년 당시 미군의 항공사진에 나타난 인근지역 모습. (본문 및 사진 출처 -‘광양시 여수・순천10・19사건 유적지현황 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광양읍 세풍리에서 바라본 무선재의 현 모습(사진 위). 1948년 당시 미군의 항공사진에 나타난 인근지역 모습. (본문 및 사진 출처 -‘광양시 여수・순천10・19사건 유적지현황 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광양읍 덕례리 108번지 무선마을과 세승마을 사이에 위치한 무선재(무선쟁이 고개)는 여순사건 당시 민간인 희생이 발생한 장소다. 

무선재(무선쟁이 고개)는 세풍 간척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세승지역 주민들이 광양읍내장을 가거나 학생들이 등교할 때 모두 이 고개를 넘어 다녔던 중요한 교통로였다. 지금은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고 있다.

1948년 11월초 경찰과 토벌군 한 무리가 14연대 군인 한 명을 포승줄에 묶은 채 80여 가구가 살고 있던 세승마을로 들이닥쳤다. 

집집마다 수색하여 젊은 사람들을 무작정 끌어냈고, 마을 앞 200평 정도의 논으로 모이게 했다.

당시 군인과 경찰은 데리고 온 14연대 군인과 주민들을 취조하면서 봉기군과 협력한 자가 누구인지를 서로 가리키게 했다. 

결국 배모씨의 아버지(당시에 자전거를 타고 광양읍과 구례 지역으로 이발 일을 다녔다)와 허모씨의 두 숙부(작은아버지는 주물공장 공장장, 막내 삼촌은 광양서국민학교 교사)를 포함해 네 명이 지목돼 마을 뒤 무선재에서 총살당했다. 

당시에 두세 살 어린아이였던 배모씨와 허모씨는 마을 어른인 신모씨(당시 14세) 덕분에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신모씨는 허모씨의 막내 삼촌의 제자이기도 하다. 

그는 숨어서 끌려가는 스승의 뒤를 따라갔다가 총살 장면을 보게 됐는데,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전한다.

이 사건 외에도 광양경찰서 사찰주임 김모씨가 수차례에 걸쳐 이곳 무선재(무선쟁이 고개)로 사람들을 데려와 사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희생자들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광양시 여수・순천10・19사건 유적지현황 조사단은 지난해 6월 현장을 답사해 여수・순천10・19사건 당시 무선재(무선쟁이 고개)의 위치를 확인했다.

조사단은 광양읍내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이 좋으므로 표지판을 세워서 교육의 공간으로 활용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의견을 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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