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과 순천의 경계를 이루는 구랑실재의 현재 모습(사진 위)과 1948년 당시 미군의 항공사진에 나타난 구랑실재 인근지역 모습. 이곳에서는 3차에 걸쳐 민간인 집단학살이 이뤄졌다. (본문 및 사진 출처 -‘광양시 여수・순천10・19사건 유적지현황 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광양과 순천의 경계를 이루는 구랑실재의 현재 모습(사진 위)과 1948년 당시 미군의 항공사진에 나타난 구랑실재 인근지역 모습. 이곳에서는 3차에 걸쳐 민간인 집단학살이 이뤄졌다. (본문 및 사진 출처 -‘광양시 여수・순천10・19사건 유적지현황 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순천시 서면 압곡리 산 103-2번지 일원의 서면 구랑실재는 여순사건과 6·25전쟁 당시 3번에 걸쳐 집단 희생이 발생한 장소다.

구랑실재는 순천 서면 삼거리에서 구상리와 광양시 봉강면으로 넘어가는 주요 교통로였으며, 현재는 고속국도 건설로 인해 높은 재를 깎으면서 지형이 많이 변했다. 

첫 사건은 1949년 9월 16일 광양읍 습격사건 다음 날 사찰계 경찰들이 좌익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연행해 광양 외곽 지역인 이곳 구랑실재와 쇠머리, 세풍리 등지에서 사살했다. 

당시 광양경찰서 경비계 순경이었던 최○○(당시 23세)는 봉기군에게 습격을 당한 일이 있으면 경찰들이 나가서 좌익 협조자들을 잡아오고, 사찰계에서 조사한 뒤, 사찰주임 김○○가 주로 사살 결정을 내리고 서장에게 보고했다고 밝혔다.

두 번째 사건은 6·25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순천을 거쳐 광양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이 있은 후, 1950년 7월 17일 경찰은 광양지역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예비검속 후 이곳으로 데려와 집단사살했다. 인민군은 며칠 후인 7월 24일 광양에 들어왔다.

세 번째 사건은 1951년 1월 14일 광양읍 습격사건 직후 사찰계에서 미리 파악해둔 좌익 혐의자 60~70여 명을 연행해 경비계 경찰이 구랑실재 등지에서 총살을 집행했다. 

당시 광양경찰서 경비계 순경 및 사찰계 형사로 근무했던 서○○은 이같이 진술했다.

2008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고속국도공사가 많이 진행된 시점에 유골 발굴 작업을 했는데 당시 유해 1구와 신발을 수습하는 정도에 그쳤다.

광양시 여수·순천10·19사건 유적지현황 조사단은 이곳은 여수·순천10·19사건과 관련해 다수 민간인이 희생된 장소로서 정확한 위치를 밝혀 교육 현장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안내표지판을 설치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양재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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