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게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 활약한 광양수군의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다. 규모가 어느 정도였으며 또 참전했던 사람들은 누구인지 그 명단조차 찾을 길이 없다.

다만 광양이 전라좌수사 관할 5관 5포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전라좌도 수군 함대에 광양 수군이 함께 편성되었음은 불문가지다. 특히 임진년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의 해로 향도(嚮導)와 중부장의 중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전승의 주역을 담당했던 광양 현감 어영담의 무용은 여러 기록에 남아 있으니 그것으로 광양 수군의 활약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전라좌수사 관할 5관은 순천, 보성, 낙안, 광양, 흥양(고흥)이고 5포는 방답(돌산), 사도(고흥 영남면), 여도(고흥 점암), 녹도(고흥 도양), 발포(고흥 도화)를 말한다.

당시 수군절도사 예하의 함대는 본영의 함선과 군사를 중심으로 각 첨사와 만호, 그리고 관할 군수와 현감이 거느린 전력으로 구성 되었었다.

군사는 장령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현지에서 징발해 충원했다. 수군의 군역이 고되고 위험해 징병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일부 경미한 죄인들을 형을 면해주는 조건으로 수군에 종군케 하는 제도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광양현 소속의 전선과 현지인으로 충원된 군사들이 현감의 지휘 하에 전라좌수영 함대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특히 정유년에는 400여명의 광양 의병과 승병들이 이순신 함대에 배치되어 참전하였던 것은 임진전란사가 실증하고 있다.

현감이 지휘하는 광양수군의 규모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임란 초기 전라 좌수사 관할 함선이 24척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광양의 전선은 한두 척에 불과했을 것이다. 왜냐 하면 본영의 함선과 첨사 만호의 수군이 주 전력이기 때문에 광양 수군의 함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충무공의 난중일기 갑오년 메모를 보면 전라좌수영의 함선이 59척으로 늘어났을 때 광양의 함선이 3척 또는 4척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물론 경우에 따라 어선과 보자기배로 구성된 지원 선단까지 합하면 그 규모는 더 많을 수 있다.

광양만은 전반적으로 수심이 얕아 큰 배가 활동하는 데는 제한이 많았고, 간조 때는 섬진강과 수어천의 물길이 닫는 협수로(狹水路)를 제외하고는 개펄과 모래톱이 드러나 배가 다닐 수 없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많은 전선을 운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임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 함선인 판옥선은 대선, 중선, 소선이 있었는데, 대선은 길이 30m, 높이 7m, 폭 9m인 대형 전선이다. 척당 수군의 수는 격군(노꾼) 80여명, 살수와 포수를 합해 80여명으로 도합 160~200명 정도다. 이러한 큰 배를 광양만에 상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광양 수군의 전선은 중선이나 소선 정도였을 것이고 수군의 수도 200명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당시 광양의 선소(광양시 진월면)조선소는 만조 시 그곳의 수심을 고려한다면 대형 판옥선도 충분히 만들어 띄울 수 있었다. 선소는 섬진강 큰 물줄기의 하구에 위치해 백운산과 지리산 등지에서 채벌된 조선용 대형 목재를 뗏목 등으로 손쉽게 운반할 수 있어서 여타 조선소보다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전선은 좌수영과 통제영 등으로 보내지고 일부 중, 소선은 광양 수군에서도 활용했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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