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박한 상황에 직면한 도원수 권율 장군은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에게 어쩌면 좋겠는지 대책을 물었다. 이순신도 자신의 고난 과정에 권율장군이 일조했던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또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왕, 즉 선조에 대한 배신감도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 그리고 충성과 대의(大義)가 전제된 삶을 살아온 장군이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직접 해안 지방으로 나가 현지의 사정을 알아보고 어떤 대책을 강구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이 시점은 왜 수군이 영남 해안 지방을 물론 이미 인접한 광양과 순천까지 진출하여 분탕질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도원수는 아홉 명의 군관과 마필을 지원해 주면서 특별대책반의 발길을 재촉했다. 이순신과 그 일행은 진주를 경유해 1차 목적지인 노량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이미 사천과 남해 일대가 적의 수중에 있음을 알고 곤양과 하동, 그리고 진주 등지를 순방하면서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8월 3일 새벽에 조정으로부터 선전관이 내려와 공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하는 교서를 전달했다. 공은 교서를 받고 숙배했다. 다시 통제사가 된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은 즉시 수군 재건의 발판이 될 호남을 향해 출발했다. 횡천과 하동을 거쳐 두치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바로 광양과 순천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검토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광양과 순천이 적에게 유린당한 것을 보고 받고 악양과 구례 방향으로 길을 돌렸다. 백의종군 때 거쳐 왔던 그 길을 거슬러 갈 생각이었다. 설혹 광양의 사정이 괜찮다 했어도 당시 계속된 장마로 쌍계동 계곡을 간신히 넘은 것이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홍수가 심한 상황에서 섬진나루를 건너기에는 문제가 많았을 것이다.

결국 장군은 구례-압록-옥과-부유창(주암)-순천-낙안-보성-장흥을 거쳐 8월 18일 회령포에 도착했고, 경상 좌수사 배설이 끌고 온 불과12척의 전선으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함대의 해상활동이 다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백 척의 전함은 물론 조선 수군이 위용을 자랑하던 거북선도 없는 상황에서 해전이 불가하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역시 조정에서는 불과 십여 척의 배로 오백여 척의 왜 수군과 대적한다는 것은 불가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순신 장군에게 수군을 해체하고 육지로 올라와 싸우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즉시 장계를 올렸다. 그 내용이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있나이다(今臣戰船 尙有十二)라는 내용이 담긴 장계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때로는 강인한 인간의 의지가 인류 역사에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던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결국 이순신 장군은 명량에서 12척의 전선으로 적선 130여척을 격파하는 실로 놀라운 신화적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일단 왜 수군의 서진(西進)을 명량에서 저지하는데 성공한 이순신 장군은 고군산열도 까지 작전상 후퇴를 했다가 그해 겨울 목포 앞 고하도에 진을 치고 108일 동안 주둔하면서 수군 재건에 심혈을 기우렸다.

그 결과 이듬해인 무술년 2월17일 통제영을 고금도로 옮겼다. 그동안 수세적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기 위한 전진(轉陣)이었다. 완도 앞 고금도로 옮겨갈 때 병력은 대개 8천에 달했다고 징비록은 기록하고 있고 전선은 80여척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거북선은 없었지만 정유년 9월 16일 명량해전 이후 불과 5개월 만에 불과 12척의 전선과 천여 명의 군사에서 이처럼 막강한 전투력을 재건한 장군의 구국열정과 애국 애민, 그리고 창조의 리더십은 어떠한 말과 글로도 찬사할 수 없을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영이 고금도로 이진한지 5개월이 지난 무술년 7월 17일 명나라 수로군 총병 진린 도독(都督)이 이끄는 명 수군이 고금도에 도착했다. 조명 수군의 연합함대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진 도독의 함대규모는 기록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뒷날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쓴 상촌집에는 진린이 거느린 수군의 병력 규모가 5천 정도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 명 유격 계금이 전선 100여척에 병력 3천3백을 거느리고 건너와 호남에 있었고 또 진린의 부총병 등자룡도 수군 3천을 거느린 것으로 기록된바 대략 1만여 명쯤 되는 것으로 짐작 된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수군 총병관 진린이 거느린 전선 5백 척이 당진으로 건너갔다고 하나 병력이 1만 정도임을 감안하면 전선은 대략 2백여 척에 약간의 지원 선단을 더하면 총 3백척 정도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임란 당시 조명 관계는 상국과 속국 관계였기 때문에 육군과 수군을 막론하고 최고 지휘관은 명나라 장수가 맡았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로인한 작전상 애로와 민사상 폐해는 말로 형언할 수 없다. 참으로 불행한 역사였고 오늘날 한미 연합군 상황도 크게 다를 바 없으니 자주적 군사력 건설이 얼마나 긴요한 것인지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불편한 상황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의연한 작전 지휘와 능란한 외교로 진린 총병을 자신의 팬으로 만들었고 마지막 전투인 관음포 해전까지 연합함대의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전투를 지휘했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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