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방마을은 구봉산 아래 황금지구 일원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고길마을과 광양황금 일반산업단지 사이에 위치한다. 바로 인근에 황금지구 공동주택단지가 들어서 있고, 지난해 골목 벽면을 활용한 벽화 그리기가 눈에 띈다.■마을유래황방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골약리(骨若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골약면(骨若面)지역에 속했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광양현 칠골약면(七骨若面) 황방촌(黃方村)지역이었고,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골약면 염포리(塩浦里)・황방리(黃方里)라 하여 2개의 행정
군재마을은 골약동과 옥곡면 경계에 있는 마을로 중군터널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성황교차로 우측의 정산마을에서 옥곡면 오류마을로 넘어가는 길을 따라가면 군재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쪽엔 재동마을이 오른쪽에는 군장마을이 나온다. 군장과 재동 두 개의 마을을 합쳐 군재라 한다.■ 군장(軍裝)과 재동(才洞) 유래군재마을은 고려 또는 그 이전에 아마대부곡(阿磨代部曲)지역에 속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당시 마을연혁은 알 수 없고, 1600년경 광양현 동면(東面) 골약리(骨若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골약면에 속했다.군재(軍才
중도마을은 진월면 끝자리에 자리한 마을로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경남 하동을 마주하고 있다. 마을은 옛날 섬이었으나 제방축조로 인해 육지가 됐다. 진월면 가길마을 방향에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가 있으며 반대쪽 섬진강변에는 갈대쉼터가 조성돼 있다.■마을형성 및 지명유래중도(中島)마을은 1760년경에 펴낸 ‘여지도서’에 당시 중도마을 부근에 있었던 섬인 마조도(馬槽島)와 함께 처음 문헌에 나타났다. 문헌상 기록에 의거해 마을연혁을 살펴보면 중도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월포리 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이후에는 월포면(月浦面)
점터마을은 심심산골 백암계곡에서 시작하는 정토천이 마을 앞을 지나고, 뒤로는 산을 등지고 있어 배산임수의 정형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시냇물을 끼고 있는 탓에 본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삼존교를 통해야 한다. ■마을형성 및 지명유래점터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옥곡리(玉谷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옥곡면지역에 속했고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광양현 옥곡면 삼존동(三尊洞)지역으로 추정된다.마을은 1780년경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처음 이곳에 정착했다고 전하는데 문헌상 기록에 의하면 이 시기보다 앞서 마을이
금촌마을은 옥곡면과 진상면 경계에 있는 잼비산을 등지고 있는 마을로 남해고속도변을 따라 진월면으로 가는 길가에 위치한다. 위치상으로 진상면 외금마을과 맞닿아 있지만 남해고속도로 아래를 관통하는 굴다리를 통하면 마을 정면이 된다.■마을유래금촌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옥곡리(玉谷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옥곡면에 속했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이 마을과 바로 인접해 있는 진상면 내금(內錦)・외금(外錦)마을을 금련촌(錦蓮村)이라 했는데 이곳 금촌(錦村)마을도 옛날에는 금련(錦蓮)이라 했음을 참고하면 당시
지난 2021년 12월 16일, 국보 제103호 광양중흥산성 쌍사자석등 환수위원회 발대식이 광양시청 대회의실에서 개최됐다. 일제강점기에 도둑맞은 광양의 국보를 제자리로 돌려놓자는 시민운동이 12년 만에 다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난관이 많다. 이전 장소와 관리 등을 둘러싸고 소유권을 가진 문화재청의 승인 등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짚어본다.■국립광주박물관에서 만난 쌍사자석등본지의 ‘지명유래와 함께 마을 둘러보기’라는 기획연재를 위해 중흥사에 올랐다. 중흥사는 대웅전을
백암마을은 옥곡면 묵백리에 속한 마을로 산 속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옥곡중학교 앞을 지나는 정토천이 이 마을에서 시작되며, 마을 뒤쪽 산고개를 통하면 진상면 웅동마을이 나온다.■잣밭골의 유래백암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옥곡리(玉谷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옥곡면 지역에 속했고,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삼존동(三尊洞)지역이었다.백암마을의 형성은 1591년경 인동장씨(仁同張氏)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라고 전한다. 마을이름 유래는 옛날 이 마을에 잣나무(栢)가 많이 자라고 있어 ‘잣밭골’이라고도
정산마을은 중마동에서 광양읍으로 가는 국도, 즉 중마IC 가기 전에 위치한 고개길을 마주하고 있는 마을이다. 성황교차로 우측에 군재마을로 향하는 작은길을 따라가면 나온다. 마을 바로 위에는 광양항전용도로가 지나고 있다.■ 우뚝 솟은 마을정산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골약리(骨若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골약면(骨若面) 지역에 속했다.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광양군 골약군 정산리(定山里)라 하여 문헌상 처음으로 마을이름이 나타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수동리・성황리・정
■죽치에서 죽양으로죽양마을은 옥곡면 대죽리 마을의 하나로 오동마을을 지나 백양마을 가기 전 좌측에 위치한다. 마을 남쪽에 나무정골이라는 남곡이 있으며 서북쪽에는 옥룡면 율천리로 가는 대티재가 있다.마을 인근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인 주먹도끼가 출토된 바 있어 선사시대에 이미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마을역사는 알 수 없고 문헌기록을 근거해 마을연혁을 살피면 1600년경에는 광양현 동면(東面) 옥곡리(玉谷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이후에는 옥곡면(玉谷面)에 속했다.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광양현 옥곡면 죽치촌(
하천마을은 중대천을 사이에 두고 구례군 간전면과 마주하고 있는 마을로 다압면 끝자리에 자리한다. 경남 하동으로 이어지는 남도대교가 가깝고 구례와 경계를 이루는 하천교를 건너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마을이 나온다. 마을로 향하는 하천길 옆 바위에는 광양을 상징하는 매화가 새겨져 있다.■마을이름의 유래하천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다압리(多鴨里) 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다압면에 속했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다압면 하천촌(下川村)이라 했으며, 1872년 제작된 광양현 지도에는 다압면 하천리(下川里)로 표
용장마을은 구봉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광양만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구봉산 전망대 가는 길에 나온다. 마을 앞쪽에 유유히 흐르는 성황천 물줄기가 천혜의 자연환경을 만들고 있다.■마을유래와 변천용장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골약리(骨若里) 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골약면(骨若面) 지역에 속했다.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행정구역 개편이전에는 광양군 골약면 용장리(龍藏里)라 하여 문헌상 처음으로 마을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용장마을은 임진왜란을 전후해 여수 돌산에서 진양정씨(晉陽鄭氏)가 처음
오동마을은 옥곡면 대죽리 5개마을 중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대리마을과 죽양마을 사이에 위치한다. 마을 뒤편으로 묵방마을로 향하는 길에 저수지가 있으며, 마을 북쪽으로 4km거리에 국사봉이 있다. ■오동(梧洞)의 유래오동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옥곡리(玉谷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옥곡면에 속했고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광양현 대리촌(大里村)지역으로 추정된다.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왜정시대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옥곡면 오동리(梧桐里)라 했다. 1914년 행정구경 통폐합으로 죽치리・대리・
서동마을은 백운산 4대 계곡 중 하나인 금천계곡에 자리잡은 마을로 여름철 물놀이 피서객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다. 위치상으로 금천계곡 상류에 해당해 마을 어디든 깨끗한 물이 넘쳐나고 수심이 깊지 않아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마을지명유래서동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다압리(多鴨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다압면에 속했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광양현 다압면 서동(西洞)이라 했으며,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광양군 다압면 서동리(西洞里)라 했다.서동(西洞)마을은
동동마을은 선녀가 내려와 베를 짰다는 옥녀봉에서 발원해 섬진강과 합류하는 백운산 4대 계곡 중에 하나인 금천계곡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다압면사무소에서 섬진강 줄기 따라 거슬러 오르다 평촌마을이 나오는데, 그 안쪽으로 들어서면 나온다. 마을은 입구에서부터 갈림길을 통해 서동과 동동으로 나뉜다.■마을 지명유래동동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다압리(多鴨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다압면에 속했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광양현 다압면 동동(東洞)이라 했으며,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백동마을은 사라실 쌍두마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샘골’과 ‘현사골’ 중간에 위치한다. 행정리상 쌍백마을에 포함되고 있는데 쌍백은 쌍두마을과 백동마을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마을유래 및 주요시설백동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사라곡리(沙羅谷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사라곡면(沙羅谷面)에 속했고,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사곡면(沙谷面) 백동촌(栢洞村)으로 문헌상 처음 기록되어 전한다.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왜정시대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사곡면(紗谷面)에 속해 백동리(栢洞里)라 했다.행정구
고베항 견학하며 광양항의 진로 모색…동포들이 이룬 성취 진심으로 축하 재 오사카 한국상공회의소(회장 박양기)의 창립 70주년을 맞아 광양상공회의소 오사카 산업시찰단이 현지를 찾았다. 1953년 5월 13일 출범한 오사카한국상공회의소는 지난 70년동안 조국의 경제재건을 지원하고, 동포사회의 상호 친목도모와 한국과 일본의 경제계를 연결하는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70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오사카 한국상공회의소는 모국에 산업시찰단을 파견하기도 하고, 조국이 어려울 때 수재의연금을 모금해 보내기도 했다.특히, 오사카 한국상공회의소는 지난
동석마을은 서석(西石), 명암(鳴岩)과 함께 석사리(石社里)에 속한 마을로 봉강면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마을은 백운산 문덕봉 아래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옆으로는 순천과 가깝고 광양읍과도 맞닿아 있다. ■동석마을의 유래동석마을은 청도기시대 유적인 지석묘가 산포되어 있어 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마을연혁은 알 수 없으나 문헌상 기록에 의하면 1600년경에 광양현 북면(北面) 며내리(旀內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며내면(旀內面)에 속했다.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임기마을은 사라실예술촌에서 옥룡으로 넘어가는 길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쌍백마을을 지나면 나온다. 마을 입구에 마을을 지키는 벅수(장승)가 세워져 있어 쉽게 마을을 찾을 수 있다.■마을의 지명유래임기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사라곡리(沙羅谷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이후에는 사라곡면(沙羅谷面)에 속했고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사곡면(紗谷面) 두곡촌(杜谷村)지역이었다.1872년 광양현 지도에 임동리(林洞里)라 하여 처음으로 문헌상 기록이 나타나는데, 전하는 이야기로는 옛날 죽림과 사곡을 합하여 사라실(紗羅室)이라 했
지곡마을은 백운저수지 아래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로 봉강면 각비마을과 인접해 있다. 석사리와 함께 광양읍과도 가까운데, 광양교통(주)을 지나 광양읍 우두마을 앞에 마련된 지석교를 건너면 곧바로 지곡마을이 나온다.■수몰지구와 마을지명 유래지곡마을은 본래 광양현 북면(北面) 며내리(旀內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며내면(旀內面)에 속했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며내면 지곡촌(楮谷村)지역이었다.지곡마을은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처음 이곳에 정착해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하는데 정확한 입촌시기는 알 수 없다. 마을이
평촌마을은 다압면 금천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 백운산 4대 계곡에 해당하는 금천계곡 하류에 위치한다. 청정수역 섬진강과 남도의 명산 백운산이 빚어낸 명품마을로 통하며, 가족단위 휴양객들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마을형성 및 지명유래평촌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다압리(多鴨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이후에는 다압면에 속했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광양현 다압면 평촌(坪村)으로 그 이름이 문헌상 처음 나타났으며,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왜정시대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광양군 다압면 평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