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화항만 구축시 생산성 30% 상승, 운영비 37% 이상 저감 가능 광양경제를 이끄는 두개의 축은 철강과 항만이다. 여기에 최근에는 이차전지를 비롯한 미래 먹거리가 새로운 전략산업으로 대두되고 있다. 정부의 양항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된 광양항은 개항 이후부터 현재까지 항상 화물부적에 시달리면서 양항체제가 빛을 바랜지 오래다. 그렇지만, 차세대 산업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출입물류의 핵심 역할을 담당하는 광양항은 광양경제의 활성화를 위한 근간일 수 밖에 없다.1997년 1단계 컨테이너터미널이 준공되면서 개항한 광양항 컨테이너부두
신답마을은 망덕포구에서 섬진강을 따라가다 보면 나오는 섬진강휴게소와 맞닿아 있는 마을이다. 그래서인지 남해고속도로가 마을 앞을 바로 지나고 있고 마을은 쉽게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마을은 고속도로 아래의 굴다리와 휴게소 뒤편으로 연결되는 길을 통해서 들어설 수 있는데 그 길이 여러 군데라서 왕래가 어렵지 않아 마을 주변에는 상가들도 제법 들어서 있다.■마을과 연결되는 섬진강휴게소신답마을은 약 370년 전 제주고씨(濟州高氏)가 처음 이 마을에 정착했다고 전하는데 현재와 같이 번창 된 역사는 비교적 길지 않다. 제방이 쌓이기 전에
개현마을은 옥룡죽천보건진료소가 있는 내천마을을 지나야만 들어설 수 있는 마을이다. 죽천보건진료소에서 내천마을을 끼고 안쪽으로 향하면 개현교가 나오는데 이 개현교를 지나면 개현마을이 나온다.■개현과 평답개현마을은 본래 광양현 북면(北面) 옥룡리(玉龍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옥룡면 지역에 속하였다. 1872년 제작된 광양현지도에 옥룡면 개현리(介峴里)로 이름이 처음으로 사용되어 나타났다. 개현마을은 평답(坪沓)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1680년경 권씨(權氏) 성을 가진 사람이 처음 입촌해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한다.
동주마을은 순천과 광양의 경계를 잇는 반송재에 걸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을 지나는 국도로 인해 주령(珠領)과 동지(東池) 두 개의 마을로 나뉘어 있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행정리상으로는 하나의 마을로 동주(東珠)라 한다. 광양에서 순천으로 가는 국도를 기준으로 동지(東池)는 반송재 왼편에, 주령은 반송재 너머 국도 오른편에 있다. ■반송재에 걸친 마을동주마을은 동지(東池)와 주령(珠領) 두 마을이 합쳐져 만들어진 마을이다. 따라서 마을 이름도 두 마을의 앞글자를 따서 동주(東珠)가 되었다.동지(東池)마을은 순천에서 광양으로 넘어오다
가길마을은 행정 구역으로는 진월면에 속한 마을이지만 위치상으로 볼 때는 진상·진월·다압면의 경계에 있다. 진상면에서 다압면으로 넘어가다 보면 불암사라는 절이 있는 가파른 절벽이 나오는데 그 절벽을 기점으로 진상과 다압이 좌우로 나뉘고, 그 아래는 진월면에 속하는데 가길마을이 그곳에 있다. ■좋은 일만 더하는 마을가길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월포리(月浦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월포면에 속했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 마을이름이 가길촌(加吉村)으로 기록된 것을 참고하면 마을의 형성시기는 약 320년 전으로
익신마을은 광양경찰서에서 초남 방향으로 가는 길 왼편에 위치한 마 을이다. 마을입구에 마을회관이 자 리하고 있으며, 마을을 알리는 표지 석도 바로 옆에 있어 마을을 쉽게 찾 을 수 있다.특히 이 마을은 여느 시 골마을과 다르게 가구 수가 많은데 오래전부터 이 마을이 발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가장골로 불리기도 익신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사라곡리(沙羅谷里)지역으로 추 정되며 1700년대 초기이후에는 사 라곡면(沙羅谷面)에 속했고 1789년 호구총수에는 사곡면(沙谷面) 익신 촌(益申村) 지역이었다.익신마을은 약 330년 전
남해고속도로를 달리다 진월 IC로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망덕산이 나온다. 장재마을은 이 망덕산을 앞에 두고 뒤로는 천왕산과 맞닿아 있다. 호남정맥을 잇는 두 산이 이 마을을 보호하는 모습이다. 또 마을 앞에는 논이 펼쳐져 있으면서도 섬진강의 물길이 바다와 접하는 망덕포구와 가까워 농·어업 모두를 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도 가졌다. ■길게 뻗은 호남정맥과 옥녀봉장재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東面) 진하리(津下里)지역으로 추정되며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진하면에 속했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진하면 장지촌(莊峙村)이라 표기되어 있
인서마을은 본래 광양현 남면(南面) 인덕리(仁德里)지역으로 추정되 는데 광양읍성과 관련이 깊다.위치상으로는 인동숲을 포함한 광 양동초등학교 부근이다. 1789년경 호구총수에는 남문외촌 (南門外村)과 둔촌(屯村)지역으로 표기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지역이 광양읍성의 남문 바로 앞에 위치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성 밖 서쪽에 위치한 마을 광양에도 읍성은 존재했다. 읍성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 기능을 펼치기 위해 1415년에 성을 쌓은 것으로 추정된 다. 규모는 둘레 549m에 높
용소마을은 진월면 마룡리에 속한 자연마을로 새로 개통된 국도 2호선 과 맞닿아 있다. 위치상으로는 진상 면과 더 가깝지만, 마을 바로 앞에 있 는 마룡교차로를 통하면 옥곡 및 광 영이 10분 내 거리로 도시로의 접근 이 보다 용이하다. 마을은 30호 남짓한 가구가 사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지만 마을 입구 의 소나무 숲이 한껏 뽐을 내고, 그 옆에 진월119지역대와 노경회 노인 복지센터가 자리하고 있어 마을은 결코 작아 보이지 않는다.■용소의 유래용소(龍沼)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 면(東面) 진하리(津下里)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1700
황곡마을은 현재 개발이 한창인 황금지구 내 위치한 마을로 하포삼거리에서 구봉산 방향으로 들어서 평촌마을을 지나면 나온다. 마을은 구봉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 잡아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있다. 마을에서도 광양항이 바로 정면에 보일 정도로 경치도 훌륭하다. ■ 누룬실황곡마을은 예부터 풍요롭고 살기 좋은 곳으로 전해오는 광양 12실(室) 중의 하나로 ‘누룬실’이라 했다. 누룬실의 유래는 이 지역이 봉화산의 광맥(광구)에 속한 지역이라 예부터 사금을 채취하기 위해 한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 고장을 찾았고, 이 때문에 ‘사금이 많이 나는 고장’
외산마을은 백계산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백운산자연휴양림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마을의 왼편에는 도선국사마을이, 오른편에는 백계산 동백림이 조성돼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현재 외산(外山)지역은 옛 광대촌(光大村. 백계리)지역이었던 옥룡사지까지 포함한다.■놋그릇을 만드는 곳외산(外山)마을은 왜정시대 행정구역개편 이전에는 옥룡면 하산리(下山里) 백계리(白鷄里)지역이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추동리·상산리·중산리와 병합하여 추산리(秋山里) 지역으로 편입됐다.이 마을은 1912년 이전까지 하산(下山)마을이라 했는데 마을 사람
선동마을은 백운산 고로쇠약수제 단이 있는 동동마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위치상으로 바로 옆 마을이기 도 하고 한때 선동마을은 행정상으 로 동동마을에 속해 있다가 2007년 에 분리되어 독립마을이 됐다. 동동 마을에서 선동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백운산 고로쇠약수제단을 지나 선동 교를 건너서야만 들어설 수 있기에 두 마을의 분리는 자연스럽다 할 수 있다. 마을회관도 동동마을에서 분 리된 지 12년 만에 새로 건립됐다.■선인(仙人)이 사는 마을선동마을은 1912년 행정구역 개 편 이전에 옥룡면 선동리(仙洞里)라 하여 문헌상 처음으로 마을
다사마을은 다압중학교가 소재해 있는 마을로 앞으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뒤로는 백운산이 감싸고 있다. 사시사철 백운산의 푸르름과 섬진강의 맑은 물길이 어우러지고 있는 가운데 봄이면 매화꽃이 만발하면서 마을 어디에서든 향기로운 매화를 사진으로 담을 수 있다. 위치로는 매화 축제가 열리는 섬진마을과 맞닿아 있다.■선비가 많이 있는 마을다사마을은 청동기시대 유적인 지석묘가 조사된 바 있으며 고려 또는 그 이전에 이 마을에 다사천소(多沙川所)란 특수행정구역이 있었으므로 마을 역사는 아주 깊다고 하겠다. 그 당시 경남 하동군을 한다사현(韓多沙懸
원적마을은 광양읍에서 옥곡면으로 가는 국도변에 자리한 마을로 남해고속도로와 관련이 깊다. 이 마을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남해고속도로 아래의 터널을 지나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마을은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가 조사된 지역으로 알려지는데 남해고속도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이 지석묘들이 발견돼 이 마을이 역사적으로 오래된 지역임을 알리고 있다.■으뜸이 되는 마을원적마을은 문헌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면 1600년경부터 광양현 동면(東面) 옥곡리(玉谷里)지역으로 추정되는데 마을 앞 지석묘와 출토유물로 보아 청동기시대(기원전 10세기~기원전 300년
원동마을은 광양에서 하동으로 넘어가는 섬진교와 접해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한때 주막거리로 불리었는데, 하동에 장이 서는 날이면 진상면 사람들이 나뭇짐이나 장삿거리를 지고 넘어와 이 마을의 주막에서 술을 먹고 쉬었다는 데서 유래됐다. 지금도 이 마을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임에 틀림없다.■평화를 여는 마을원동마을은 1750년경 인동정씨(仁同丁氏)가 처음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했다고 전하나 이보다 훨씬 먼저 이곳에 섬진원(蟾津院)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실제 설촌연대는 그 이전인 것으로 추정된다.원동(院洞)이름 역시 섬진
동동마을은 백운산 자락의 남쪽 입구에 자리 잡은 마을로 백운산 노랭이봉을 등지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은 높고 낮은 산세가 좌우로 감싸고 있어 따뜻함을 자아내고 있으며 백운산고로쇠약수제단과 동곡보건지소가 있다.■송천사지동동마을은 백운산 노랭이봉 바로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450년 전 이천서씨(李川徐氏)가 처음 정착하였다고 전하기도 하며, 여산송씨·김해김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고도 전한다. 동동마을의 처음 이름은 마을형국이 학(鶴)의 모습이라 하여 학동(鶴洞)이라 하였는데 그 후 이곳 지역이 절터 주변지역으로 변모되면서 이 마을에 위치한
송현마을은 대리마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인지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위쪽에는 송현 저수지가 자리하고 있으며 송금방천으로 향하는 아랫마을에는 소나무가 정갈한 자락섬이 있어 그 모습이 남다르다.■소나무 고개송현마을은 고려 또는 그 이전에는 당시 특수행정구역인 문현소(蚊峴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789년쯤에는 월송우촌(月松宇村)이란 지역이었으며 1912년 왜정시대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월포면 구송리(舊松里)에 속했다. 이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진월면이
백양마을은 옥곡 대죽마을과 수평마을을 잇는 대치길 북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는 수평천이 흐르고 뒤로는 크고 작은 동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전형적인 시골마을의 아늑함이 묻어난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가에는 사계절 모습을 달리하면서도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는 300년 된 보호수가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고 있다.■두 개의 마을이름 유래백양마을은 1480년경 해주정씨(海州鄭氏)가 처음 이곳에 정착했다고 전하는데, 마을 입구 언덕 주변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인 주먹도끼가 출토돼 지금부터 약 1만 년 전에 이곳 부근에서 사람이 살았을
예구(禮求)마을은 이름에서부터 예절이 묻어나는 마을이다. 예절을 뜻하는 ‘예(禮)’를 마을 이름에 사용해 ‘예절을 구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서다. 그만큼 이 마을이 오래전부터 예를 중시했으며 역사 또한 깊다 하겠다.현재 예구마을은 LF스퀘어와 광양 운전면허시험장 건너편에 위치하여 마을의 대부분이 현대화되어 가고 있지만 마을 한편은 아직도 골목길 등 옛 모습이 남아있다. ■목마른 꿩의 모습예구마을은 마을입구 도로변에 11기의 지석묘, 오성아파트 단지공원 내 13기의 지석묘 등 청동기시대 사람의 시체를 매장했던 고인돌이 집단으로 위치
이정마을은 진월면 선소마을에서 북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시골의 전형적인 마을이다.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갯가를 끼고 있으면서 지금의 마을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렇다고 마을의 모습이 크게 변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정겨운 옛 시골의 모습이 자연과 함께 어울려 있다.■이도촌(狸島村)이정마을은 본래 광양현 동면 진하리 지역으로 추정된다. 1700년대 초기 이후에는 진하면에 속했으며 1789년경에는 진하면 이도촌(狸島村)이라 했다.이도촌이라고 했던 이유는 옛날 이 마을이 갯가에 위치하였는데 이정마을과